기념, 기림, 추념--1952년생 나의 기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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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주한광 (choohg@sejong.ac.kr) 작성일 : 24.06.30 조회수 : 4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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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다부동전적기념관.
. . <기념, 추념, 기림, 맞이함---1952년생 나의 기억>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우리는 이승만대통령기념관으로써 그의 이름을 더욱 기억하게 될 것이다" 1946년 8월 15일 (자료) "기념" "맞이함" "815해방기념일", "해방1주년기념일을 맞이하여 조선의 독립을 기원", "해방 제2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조국광복의 여명을 약속한 날" (동아일보, 조선일보) 1947년 8월 15일 (자료) "기념" "맞이함" "소위 해방된지 두돐을 맞으며 진정한 해방을 맞자", "해방2주년을 맞으며...완전자주독립 (위해) 우리는 아직도 싸운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이로 보건대 이때까지는 815는 해방이었고, 광복이나 독립은 아니었다. 해방 이후에 얻을 광복과 독립을 염원했다. 1950년 8월 15일 (자료) "기념" "맞이함" 광복절 2주년 기념식을 대구에서 거행했다. (참고. 이중근 편, 625전쟁 1129일, 2014년) 그보다 앞서 1949년 10월에 4대 국경일을 제정하였다.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1950년 4월 문교부에서 광복절 노래를 제정하여 공포하였다. 그런데 1951년 8월에 "815해방의 날 광복절", "여섯번째 맞는 광복절의 날", "광복 6주년"과 같은 신문기사가 실렸다. 1952년에는 "제7회째 맞이하는 광복절 ... 대한민국정부수립 4주년기념일"이라고 했다. (참고. 동아일보, 조선일보) 이로 보건대 광복절이 건국보다는 해방을 ′더 기념하는′ 국경일이 되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36년간 일제의 압제에 대한 기억이 3년간 미군정 아래 좌우대립 등 혼란에 대한 기억보다 더 강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자유대한민국으로서 건국한 것의 역사적 의의를 잊고 있기 때문이겠다. ′분단된 해방′과 ′분단된 건국′의 엄연한 현실 가운데 ′통일된 건국′에 대한 염원이 컸던 때문이었을까? 1950년 9월 18일 (자료) "기념" 우리나라는 10월 24일을 국제연합일로 지정하였다. 625동란중 유엔군이 참전하여 자유대한민국의 존립에 혁혁하게 기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1975년까지 법정공휴일로 지켜졌다. 1959년 (국민학교 1학년) "기념" 운동회를 맞아 며칠 전부터 운동장에 만국기가 높이 달려졌다. 그 중에 파란 바탕에 지구가 그려진 유엔기도 있었는데, 유엔군은 딱지놀이나 만화에 나오는 지구군이라고, 어린 우리들은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에도 만국기를 다는지, 그러면 유엔기도 함께 다는지 궁금하다. 1960년 10월 3일 "추념" 후에 내가 다니게 되는 경기중고등학교 교정에 개교기념일을 맞이하며 민주혁명학생위령비가 세워졌다. 419 당시 희생된 재학생 2인 및 졸업생 2인을 추념하고 있다. 1961년 5월 16일 (국민학교 3학년) "기념" 우리 집에는 이때까지도 "민의원 박○○"라고 인쇄된 기념수건이 많이 쌓여 있었다. 사실 나의 집안의 정치 내력으로 보면 대체로 반공자유우파였으나 당시 일시적으로는 이승만대통령이나 박정희대통령과 다른 배를 타고 있었던 셈이다. 내게도 그해 겨울은 마음까지 추웠다. 1961년 6월 (국민학교 3학년) "상기하자" 어느 과목 숙제였는지 앞집에 세들어 사는 반 친구와 같이 "상기하자 625"라고 쓰여진 포스터를 작성했다. 한자를 모른 채 想起라는 어려운 표현에 익숙해졌다. 그무렵 교과서 맨 뒷면에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휘날리자"와 같은 표어가 인쇄되어 있었다. 1963년 6월 (국민학교 5학년) "추념" 5학년을 중심으로 학생대표 스무 명쯤이 인솔 선생님과 함께 국군묘지(1957년 준공. 1965년 국립묘지. 1996년 국립현충원. 2006년 국립서울현충원)에 가서 헌화를 했다. (그후에 국민학생 등 학생들이 국립현충원에서의 추념식에 얼마나 참여했는지 궁금하다.) 1964년 10월 24일 (국민학교 6학년) "기념" 국제연합일은 법정공휴일이어서 하루종일 과외공부를 했었을 것이다. 다시한번 625동란에 참전한 유엔군 16개 국가들을 12월 입시에 대비하여 외우고 있었을 것이다. 1965년 (중학교 1학년) "기억" 대부분의 월요일 아침에 운동장에서 조회가 열렸다. 밴드부의 주악, 애국가 제창, 묵념, 훈화, 교가 제창. 그런 형식의 조회가 없어져버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당시의 학교교육은 ′사회인′교육 ′국민′교육에도 방점을 찍었다고 하겠다. 함께 국가와 모교를 기억하며 국가 속의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이 되도록 권고했다. 어린 나로서도 아홉 자 한자로 쓰여진 교훈이 품격 있고, 고상하여 제1의 명문학교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만큼 경기인에 대한 사회적 기대 내지 질시가 있었을 게다...대부분 앉아있던 일반버스에서 (내 짐작에 가장) 저학년에 몸집도 작았던 나에게만 (그렇게까지 안 늙은) 어른한테 자리 양보 않는다고 꾸지람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중1때 나는 반에서 13번인가 했었다.] 1966년 (중학교 2학년) "이름 기념" (기억이 어렴풋한 중학생 시절이어서 확인해보니) 중2 가을, 율곡로라는 도로명을 만들었다. 중앙청 앞에서 안국동으로 가는 전차길이 약간 가팔랐다. (이제 알아보니) 미군정기인 1946년에 세종로, 을지로, 퇴계로 등 人名이 들어간 도로명을 만들었고, 아주 오랜 후 2003년 경 이승만별장길(고성군), 윤보선길(안국동), 박정희로(구미시) 같은 도로명을 쓰기 시작했다. 1966년 (중학교 2학년) "이름" 윤리 시간에 북한 실상에 대한 글을 많이 소개해 주셨다. 어떤 때에는 한시간 내내 북한사람들의 수기를 선생님이 읽어주시고 우리는 들었다. 김일성대학, 김책시 같은 것을 들었던 것 같다(1946년 개교. 1953년 성진시를 개칭). 사람 이름을 붙인 명칭이 매우 이상했다. 1968년 1월 (중학교 졸업) "기억" 중학교 3개년 중 2학년 때 기억이 가장 많다. 강○○, 박○○, 양○○, 조○○, 그리고 재일교포 학생이었던 조직휘 등 경기중 17회 졸업생으로 경기고로 진학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없어진 경기중학교가 어떻게 기억될까? 1968년 (고등학교 1학년) "기림" 연필 스케치 실습을 했던, 뒷동산에 있는 미술관. 미술선생님이시던 오천룡 선배는 이만한 시설의 미술관은 프랑스 어느 고등학교에도 없다고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없지만 이렇게) 말했다. Caro mio ben ...을 노래했던, 운동장 회화나무 옆 음악당. 그리고 물리, 화학, 생물을 배우던 과학관의 계단식 과학교실들. 미국 같았으면, 기증자(기증단체) 또는 기리기 위한 인물의 이름을 붙였을 수 있었겠다. 우장춘실 같은 식으로. 1968년 (고등학교 1학년) "기념" 중학교 3학년 담임 박익두 영어선생님 추천으로 들어간 영어회화클럽을 1년간 다녔다. 토요일 오후에 시내에서 모였는데, 장소가 몇번 바뀌었다. 그 중 하나가 정동제일교회 구내에 있던 서양식 건물 젠센기념관이었다. 나로서는 아주 나중에 Anders K. Jensen 선교사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1897년 덴마크 출생 미국선교사로 1929년 내한하고, 1940년 추방되고, 1945년 다시 내한하고, 625동란이 일어난 날 개성에서 북괴군에 납치되고, 1953년 모스크바에서 석방되고, 미국에서 1954년 다시 내한하고, 사역중 1956년 돌아가시며 양화진에 잠들었다. 부인이 기금을 조성하여 1960년에 이 기념관이 세워졌던 것이다. 1969년 (고등학교 2학년) "추념" 박원익 교장선생님께서 부임하셨다가 편입학생 문제로 퇴임하셨다. 어느 조회 시간에 당신의 아드님이 위령비에서 기리는 박동훈(419 당시에는 졸업생)이라고 하셨다. 중학생 때부터 보아온 네 분의 부조상을 새롭게 바라보았다...희생학생의 부친을 뵈었던 것이다. 1973년 (대학교 3학년) "기념" 수유동에 살았기에 종암동에 있는 서울상대를 다니는 게 편했다. 그러나, 대학교의 필수적 건물은 도서관과 기숙사라고 설파하던 어느 미국대학 총장의 글을 읽었던 나는 서울대학병원 구내에 있던 正英舍에 들어갔다. 공식적으로 그 한자 명칭만 쓰였는데, 혹자는 박정희대통령과 육영수영부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했다. 사실 영부인께서는 몇차례 방문하시기도 했다. 그 기념사진도 남아있다. ′박정희육영수기숙사′라고 명명하는 문화 내지 국민적 수용이 없었던 것이다. ...기숙사에 함께 살던 정○○ 선배는 516장학금을 받았는데, 명칭을 불편하게 생각했다. 다음해 2월 미대졸업생이 서울대 전체수석 대상이었는데 그 선배는 교련점수 때문에 차석이 되고, 그 대통령상은 여학생에게 돌아갔다. 자료를 찾아보니 박정희대통령은 516혁명 이후 1974년까지 매해 서울대 졸업식에 참석했었다. 1974년 (대학교 4학년) "기념" 4월에 안암동 고려대학교는 418기념마라톤을, 10월에 종암동 서울대 상과대학은 홍릉제 마라톤을 했다. 고려대 운동장에서 419학생혁명기념탑까지 왕복, 서울상대 운동장에서 수유사거리까지 왕복. 동일한 단축 마라톤이지만 기념의 내용이 달랐다. 나도 ′홍릉제′라고 쓰인 배번을 달고 달렸는데, 연도에 선 시민들이 홍릉제가 뭐야, 하는 말을 듣고 맥이 좀 풀렸다. (홍릉이 가까이 있어서 서울상대 축제를 홍릉제라고 불렀다.) 서울대학교 개교기념마라톤이라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한편 고려대 418기념 마라톤에 대해서는 연도의 시민들이 많이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 이름과 전통과 규모 때문에. 1975년 2월 (서울상대 종암동 시절 마감) "기념" 서울 상대 등 모든 서울대 단과대는 동숭동 문리대 캠퍼스에서 졸업식을 했다. 그리고 관악캠퍼스로 이전했다. 박정희대통령 시절의 일이었다. 그후 지금까지 관악캠퍼스에 박정희대통령 관련하여 아무런 기념물이 없다고 들었다. 1976년 9월 "기념" 북한이 UN의 산하기구에 가입하는 것에 항의하여 국제연합일이 법정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 다만 국가기념일로는 존속한다. 1978년 (유학 첫해) "기념" 캠퍼스 남쪽 길 건너에 있던 기숙사에 살았는데, John Jay Hall이었다. 이번 기회에 Google에서 알아보니 John Jay는 프랑스의 위그노 선조를 둔,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이며 콜럼비아대학(당시는 Kings College)를 나왔다. 1980년 "기념" 콜럼비아 대학 본관인 Low Memorial Library (A. A. Low를 기념) 옆 뜰에 기념식수가 심겨졌다. 일본인 기업인이 모교에 장학금을 기증하면서 벗꽃 한 그루를 심었던 것이다. 나와 함께 근처 벤치에 앉아 있던 김근종이 일본 사람들 덕분에 황인종들이 덜 무시받는다고 말했다. [나중에 읽은 책이지만, Ezra Vogel이 Japan as Number One: Lessons for America를 써낸 해가 1979년이었다.] 1981년 (유학생 시절) "기림" 콜럼비아대학한국학생회에서 집회를 가지면서 한국 영화를 상영하고 마칠 때 고향의봄을 불렀다. 애국가 대신에 불렀던 것인데, 눈물을 흘리면서 불렀다. 그 노래는 "타국에서 고국을 기리는" 애국의 노래가 되었던 것이다. 베르디의 <히브리인들의 합창>이 이탈리아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1981년 "이름" MIT에서 공부하던 형을 방문하고 보스턴 시내 관광을 했다. 케네디기념관에서 듣게 된 게 오래 기억에 남는데, 그것은 영상물에서, 당시 선거유세중 지지자들이 외치던 구호였다. "We want Kennedy, we want Kennedy!" 그런 격의 없는 호칭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나중에 쓰이게 된다. 옛날에는 "이승만, 이승만!", "박정희, 박정희!"라는 선거구호는 꿈도 못 꾸었다. 그리고 부모를 지칭할 때 "○, ○자, ○자입니다"라고 해야 옳다고 여겼다. 1985년 "기념" 우리나라의 개신교는 이 해에 선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많이 치렀다. 1985년 (세종대학교 교수) "기림, 맞이함" 세종대학교에 부임했다. 창립자는 연희전문을 나오셨는데, 학교 건물 이름을 다음과 같이 지었다. 광개토관, 영실관, 모차르트홀, 용덕관 등. 영실관은 세종대왕 시기의 장영실, 용덕관은 일제시대 한국복싱의 개척자 최용덕을 각각 기리는 자연과학관, 체육과학관이다. 이참에 이화여고의 유관순기념관을 알아보니,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2003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1988년 9월~10월 "기념" "appreciate" 서울올림픽이 열렸다. 지금 나는 당시의 "손에 손 잡고..." 올림픽기념곡이 들어있는 기념음반을 손에 들고 있다. 참 시원하고 호쾌한 노래다. 내가 2007년 가을부터 후쿠오카대학에 1년간 체류할 때 후쿠오카한인교회의 교인분들이 하시던 말씀이 기억난다. 일본인의 한국 및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88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크게 바뀌었다고 하셨다. 1988년을 한국에 대한 인식 고취의 원년으로 기념할 수 있겠다. Visit Korea 처럼 Appreciate Korea 라고 할까. 1990년 (싱가포르 체재중) "기념" 싱가포르에 가서 이태를 살게 되었다. 독립기념일을 전후하여 며칠간 비가 오더라도 각 가정에서 국기를 게양하고 있었다. 당시까지 우리나라 가정에서는 하루만, 그것도 비나 눈이 안 와야 국기를 게양했었다. 나중에 싱가포르처럼 바뀌었다. 1995년 "맞이함" 해방 50주년을 맞이하며, 한국교회들은 성경에 기록된 희년(Jubilee)을 외치며 조국통일을 기원했다. 2000년 1월 1일 "맞이함" 전세계적으로 온인류가, 국가적으로 온국민이 새천년을 맞이하였다. 교회에서도 새벽에 모여 이 날을 예배 가운데 맞이하였다. 예배를 마친 후에 새해 인사를 너머 새천년 인사를 나누었다. "Happy New Millenium!" ... 그런데 얼마 후 경제적으로는 IT 버블이 꺼지면서 unhappy한 경기침체를 맞이하였다. 2002년 "기념" 한일월드컵대회가 열렸다. 아마도 이 때부터 태극기나 한글 자모를 (근엄하게가 아니라) 편하고 친근하게 대했던 것 같다. 태극기를 기념하는 태도가 바뀌었고, 한글 자모의 가치를 높이보는 태도가 생겼다고 여겨진다. 2007년 "이름" 후쿠오카대학에 가을부터 1년간 가 있었다. 객원교수를 위한 숙소는 시내 주택가에 있었다. 간접적으로나마 가까이서 일본사회를 엿볼 수 있었다. 옛날 우리처럼 문패를 달았는데 姓名 중 姓만 써놓고 있었다. 성씨가 우리와 달리 매우 많기 때문이려니, 생각했다. 2011년 "맞이함" 서울상대 입학 40주년을 맞이하여 종암동에 있는 옛 교정에서 모였다. 서울사대부중으로 쓰이고 있었다. 재일동포 유학생들에게도 연락을 해서 두 명이 일본에서부터 왔다. 경영학과를 다녔기에 나는 모르고 있던 동창들이어서 수인사 이외의 긴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2012년 "기념" 신문기사에 의하면, 한국동문회가 프린스턴대학에 5억 5천만원을 기증하면서, 1910년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승만대통령을 기념학술기금(The Syngman Rhee 1910 Memorial Fund) 및 기념강의실(Syngman Rhee 1910 Lecture Hall)로써 기념하게 되었다. 우드로 윌슨 스쿨 건물 안에 있는 계단식 강의실의 벽면에 기념동판이 부착되어 있다고 한다. 2017년 6월 24일 "기념" 칠곡군에 1981년에 (비로소) 건립된 다부동전적기념관을 찾아갔다. 내가 안동의 사단병참중대에서 장교로서 군복무를 했던 1975~1976년에 보급품을 수령하러 경산까지 예닐곱번 오갈 때, 그 다부동 고개를 넘어야했다. 비포장도로 옆에 서있는 ′다부동′ 팻말이, 그곳이 그렇게도 치열했던 격전지였음을 가르쳐 주었을뿐 그 외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격전 이후 25년이 흘러가버린 때였다. 2017년 7월 "기념" 경북 구미시에서 진즉 기획했던 박정희대통령 탄신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이 무산되었다. 그토록 자유대한민국이 정체성을 위협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위기는 지속되고 있다... 2020년 8월~9월 "추념" 코비드19가 조금 수그러진 한 달간 스코틀랜드 등지를 둘러보았다. 여러 곳에서 전쟁참전용사추념비를 볼 수 있었다. 성명, 출신지역 등이 새겨져 있었다. 2022년 9월 30일 "추념" 경기고등학교 교정에서 경기인호국영웅명비 제막식이 열렸다. 최병민 경기고총동창회장 등 10여 명의 67회 동창들도 참석했다. 이후 그 앞에서 찍은 동창들 사진이 가끔 카톡방에 올라오고 있다. 2023년 5월 "기념" 경기고 졸업50주년 기념여행을 코비드19 때문에 2년 늦게 다녀왔다. 출발을 앞두고 내가 짧은 생각에 "졸업52주년 기념여행"이라고 ′연대기적으로′ 카톡방에서 말했더니, 곧장 서의호 기념여행준비위원이 "이건 언제 가더라도 졸업50주년 기념여행"이라고 ′역사기념적으로′ 답해 왔다. 2023년 9월 "기념"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에서 이승만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행하는 뉴스가 들려왔다. ... 그러나 나는 무심하였다. 2024년 6월 6일 "추념" 현충일에 조기를 게양하였다. 우리 아파트단지에 예전과 비슷한 숫자의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카톡방에는 국립서울현충원에서의 사진이 올라왔다. 2024년 6월 7일 "기념" 경기고나라지킴이 카톡방에서 64회 선배분이 이승만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제의했다. 2024년 6월 10일 "기념" 경기고 67회카톡방에 김주성동문이 경기고나라지킴이의 모금운동 공지를 올리면서 67회 동창들의 모금운동이 시작되었다. 2024년 6월 11일 "기념" 나는 머지않아 세워질 기념관을 마음 속에 그려보며 글을 써서 경기고67회 홈페이지에 올렸다. 그리고 그후 그 글을 조금 더 길게 수정했다. https://www.kg67.or.kr/m/column/madang.php?ptype=view&idx=63130&page=1&code=madang ... 나의 기억은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지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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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놀라는 것은 어린 시절의 기막힌 기억력이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거기에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예기소설까지 등장시키니 더 놀랍습니다.
시간이 허락하면 대한민국의 미래를 그리는 소설가로 등장해 보심도 좋을 듯합니다.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저도 페북에 자서전을 올리는 중인데, 주교수도 자서전을 써보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과거를 소중하게 기억하는건 정서적으로도 좋고 후세에도 귀감이 될것 같습니다 - 서의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