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연재 20회 - 문학으로 보는 세계사: 로마와 기독교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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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진형준 (hjchin03@naver.com) 작성일 : 24.07.01 조회수 : 199 | |
기독교 탄압과 기독교 공인 기독교가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선교 활동을 통해 소아시아와 지중해 연안을 비롯해 그리스와 로마로 전파·확산된 때는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탈바꿈하던 시기이다. 그 시기는 아직 로마 황제가 전제군주로서의 절대적 권위를 지니고 있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로마가 황제를 중심으로 ‘지상의 패권’ 장악에 나선 시기였다. 따라서 기독교가 초기부터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신의 왕국’을 믿고 섬기는 기독교인들은 로마제국에게 위험한 존재들이었으며, 그 세력이 확장되어 간다는 것은 제국에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앞 장에서 언급했듯 기독교가 로마의 탄압을 받은 것은 기독교 신앙 체계가 로마제국의 신앙 체계와 어긋나기 때문이 아니었다. 기독교의 존재 자체가 로마제국 체제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위험한 존재였던 것은 그들이 직접 로마제국 체제에 저항하고 그 체제를 바꾸려 했기 때문이 아니다. ‘신의 왕국’을 우선시하고 섬기면서 ‘황제의 제국’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다. 체제에 직접 저항하는 것보다 체제 자체를 비웃는 것이 가장 심각한 반체제일 수 있으니, 그 비웃음은 체제 전체에 대한 근본적 비판의 눈길과 같은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네로 황제(재위 54~68)는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하자 기독교도들에게 방화범의 혐의를 씌워 대학살을 자행한다. 로마에서 마지막 선교 활동을 하던 사도 바울과 베드로도 그때 처형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5현제 시대를 지나는 동안에도 기독교도들에 대한 박해는 여전했으며 군인-황제 시대에 이르러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실질적으로 절대 군주의 지위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 재위 시절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절정에 달한다. 앞에서 말했듯, 그는 전제 군주정을 도입하면서 오리엔트 군주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그는 페르시아식 궁정 예법을 도입했으며 자신을 신격화했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에게 황제를 신격화해서 숭배하는 것은 우상 숭배를 금하고 있는 십계명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들이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에 분노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03년 그리스도 포교와 모임을 금지하는 칙령을 공표하고, 교회와 성전, 성물을 파괴했다. 그는 고발 없이도 그리스도교인을 체포하고 고문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철저히 기독교를 탄압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전통적인 로마의 신에 대해 제례를 행할 것을 명하고 이를 어기면 사형이나 강제 노역에 처하겠다고 위협했다. 기독교도들에게 배교(背敎)냐, 순교(殉敎)냐, 양자택일을 강요한 것이다. 수많은 기독교도가 기꺼이 순교의 길을 택했음은 물론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사후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의 내분을 수습하고 제국 서방의 정제(正帝)로 군림하게 되었을 때 그는 동방의 정제 리키니우스와 협의하여 313년 밀라노 칙령을 공포하고 기독교를 공인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업적을 이어받아 완수한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는 달리 기독교를 공인하고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이미 로마제국 전역에 널리 확산되어 세력을 떨치고 있는 기독교를 힘으로 제압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상황이 그러했더라도 그런 결단은 아무나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대의 흐름을 읽고 그에 대처할 수 있는 안목을 지닌 사람만이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가 대제의 칭호를 받을 수 있는 것은 그 안목과 결단 덕분이다. 콘스탄티누스는 323년 9월에 벌어진 크리소폴리스 전투에서 동방의 정제인 리키니우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로마제국 유일무이한 황제가 된다. 로마제국을 재통일한 그는 325년 니케아(현재 터키의 이즈니크)에 있는 자신의 별궁으로 로마제국 내 기독교 주교들을 불러들여 공의회를 개최한다. 바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이다. 기독교 교리를 공식적으로 정리하여 분열의 조짐을 보이던 기독교 교회들의 통합을 꾀한다는 것이 공식적 명분이었다. 하지만 교회들의 통합은 표면적인 명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권좌에서 물러난 후 로마가 분열되는 현실을 경험했던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교리를 정리하고 공식화함으로써 기독교라는 종교의 이름으로 로마를 통합하고 분열을 예방하고자 했을 것이다. 또한, 기독교 교회 주교들이 모인 공의회를 황제가 주재함으로써, 황제의 권위를 한껏 드높이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니케아 공의회가 열렸을 때는 아직 로마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기 전이었으나 실질적인 제국의 중심은 이미 동방으로 옮겨간 때였으니, 콘스탄티누스는 서방 로마의 황제라기보다는 오리엔트의 군주에 가까웠다. 기독교 내 교리 논쟁과 삼위일체설의 정립 당시 기독교 교회 조직은 제국의 조직을 그대로 본뜨고 있었다. 도시마다 주교가 있었으며 주교 관구의 범위는 도시의 영역과 일치했고 로마제국 수도가 교회의 중심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기독교를 공인했을 때 기독교를 이끌어 가는 주요 3대 총대주교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의 주교좌였지만 콘스탄티누스의 별궁이 있던 아나톨리아 반도의 주교도 이미 중심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예수가 탄생한 예루살렘의 주교도 중요한 위치였다. 4세기에 이미 기독교는 로마제국 내 전 영토, 즉 유럽 대륙과 지중해, 오리엔트 전역에 걸쳐 널리 세력이 퍼져있었다. 그러나 갓 공인된 기독교 내부에는 교리 대립이 존재했으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할 당시에는 교리 논쟁이 매우 치열했다. 당시 로마를 제외한 제국 내 주요 교구들은 시리아, 아나톨리아 반도의 기독교 교회를 중심으로 열띤 신학적 논쟁에 휩싸여 있었다.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의 관계에 관한 논쟁으로서 예수를 신성한 존재로 볼 것인가, 아니면 예수에 인성을 부여할 것인가 하는 것이 논쟁의 핵심 쟁점이었다. 카렌 암스트롱이 쓴 『신의 역사』에 의하면 ‘오늘날 미국인들이 미식축구를 화제 삼아 이야기하는 것 못지않게’ (카렌 암스트롱 『신의 역사Ⅰ』, 194쪽, 1999, 동연)많은 사람이 그 신학적 주제에 대해 즐겨 논했다고 하니, 당시 종교적 논의는 기독교 교부들 사이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라 일반 신도들에게도 일상적인 주요 관심사였음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 일반 신도들 사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논리는 성부만이 유일무이한 신이며 성자는 성부에 의해 생명체로 태어난 피조물이기 때문에 성부와 동격일 수 없다는 논리였다. 바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교회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아리우스(Arius, 250(?)~336(?))가 주장한 논리로서, 그는 그 논리로 당시의 신학적 논쟁에 불을 붙인 것이었다. 아리우스는 무엇보다 성부와 성자의 질적인 차이를 강조했다. 그는 성부만이 유일한 신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본질상 신이라고 믿는 것은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피조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은 성부와 예수가 동일본체(同一本體)라는, 기독교 사도들에게 이어져 오던 전통적 가르침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자체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신성한 존재이다. 그러나 예수의 신성은 본원적인 것이 아니라 신이 내려 준 보상이요, 은총이었다. 그는 인류 구원을 위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신에게 복종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이 그 얼마나 고매한 것인지 인정했다. 아니, 그 고매함을 오히려 크게 강조했다. 사실상 아리우스의 신학적 논쟁은 바로 예수의 사랑과 희생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예수에 인성을 부여함으로써, 인간이 고매한 덕을 갖추고 행하면 신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흠 없는 삶을 살았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때까지도 신에게 복종했기에 신이 예수를 부활케 해서 주(Lord)라는 신적 지위를 부여했다는 것이었다. 기독교 정통 사도의 가르침을 내세우며 아리우스의 논리에 정면으로 맞선 사람이 알렉산드리아의 부제(副祭)였던 아타나시우스였다. 아리우스가 그리스도에 인성을 부여한 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에게 신성에 이를 가능성이 있음을 – 비록 성부가 부여해준 것이긴 해도 – 믿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달랐다. 그는 인간의 가능성을 믿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인간은 무(無)로부터 나왔으며 죄악을 저지름으로써 결국 파멸에 이른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신은 인간이 파멸에 이를 존재임을 알고 있고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당신의 영원한 말씀(로고스)을 통해 만물을 만들었으며 존재를 부여했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파멸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로지 신의 말씀(로고스)을 통해 완전한 존재인 신의 세계에 참여함으로써만 파멸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로고스)이 육체의 모습으로 나타난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피조물에 속한다면 그 역시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었고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세계를 창조한 분만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 따라서 로고스의 성육신인 그리스도는 성부인 신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아타나시우스가 내세운 주장의 내용이었다. 사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교리 자체에는 무지했고 관심도 없었다. 앞서 말했듯 그는 기독교를 통해 로마의 분열을 예방하고 로마 황제의 권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공의회를 연 것이었다. 그는 공의회를 열기 전부터, 교회에서 서열이 아리우스보다 높았으며 전통적인 기독교 사도의 가르침에 충실한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기로 이미 마음먹고 있었다. 교회 통합을 도모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입장에서 전통적인 기독교 사도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공의회에서 처음부터 아타나시우스의 견해를 전적으로 지지하는 주교들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은 중도파였다. 그러나 그들은 아리우스로 인해 촉발된 교리 논쟁이 끝나기를 원하고 있었다. 게다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압력도 작용했다. 그 결과 아리우스파 주교 5명을 제외한 300여 명의 주교가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에 찬성했고 아리우스파는 이단 선고를 받고 파문을 당한다. 이어서 공의회는 예수와 성부가 동일본체라는 정통적 가르침을 발전시켜 예수가 성부, 성령과 똑같은 신적 본질을 지녔다는 삼위일체론을 교리로 선포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공표된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피조물도 아니고 영적 중재자도 아니며 세계는 무로부터 창조되었음을 기독교 교리로 공식화한 최초의 문서가 되었다. 성자는 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아리우스의 주장을 물리친 것이다. 물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파문을 당했다고 해서 아리우스파가 단번에 세력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파문을 당했으나 아리우스파 주교들은 회의가 끝나고 교구로 돌아가자 다시 아리우스의 가르침을 전파했고 그 가르침은 로마제국 특히 유럽의 제국 속주 전역에 널리 퍼졌다. 아리우스파는 테오도시우스 황제(346~395, 재위 379∼395)가 380년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고 아리우스파를 강력히 탄압하게 되면서 로마제국 교회 내에서 세력이 꺾였지만 이미 기독교의 세례를 받은 제국 속주의 야만인들, 특히 게르만계 고트족 내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삼위일체설을 기독교 정통교리로 선포한 이후에도 기독교 교리 논쟁은 그치지 않았다.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논쟁은 계속되었으니,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네스토리우스이다. 그는 마치 하느님께서 성전 안에 거처하듯 예수 안에 거하신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은 엄격하게 구분된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예수는 하느님이 거하시는 성전과 같다는 주장이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를 열어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또한, 451년 개최된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근처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에우티케스(Eutyches)가 제기한 단성론(單性論), 즉 그리스도라는 존재 안에서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이 융합되었지만,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어 신성만이 남는다는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단성론 자체가 삼위일체설에 반하는 교리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네스토리우스를 따르던 교도 일파들은 5세기 말 페르시아로 옮아가 교회를 일으킨 후 박트리아와 인도까지 교리를 전파했으며, 중국 당나라 때는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꽤 세력을 떨쳤다. 동방 교회에서는 그렇게 삼위일체설을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었지만, 서방의 라틴 교회에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 삼위일체설을 정교하게 체계화해서 서방 기독교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만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설을 재차 공식 교리로 삼은 에페소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가 열리기 전에 활동했던 인물로서 그의 업적 덕분에 서로마제국 멸망 후 기독교가 유럽 문명이라는 새로운 문명 탄생의 주춧돌이자 주역이 될 수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천 년이 넘도록 서방 기독교 중심 사상 체계를 교회에 제공한 인물이었으며, 그가 제공한 기독교 사상은 중세 유럽 건설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 그가 기독교의 범주를 넘어서서, 서구 정신 전체의 기초를 닦았으며 서구 문화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로 간주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타가스테(지금의 알제리 수카라) 출생으로서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가르치던 중 이란 계통의 영지주의(靈知主義) 마니교로 개종한 적도 있었고, 기독교의 성육신 교리를 신성모독으로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결정적인 몇 차례의 회심을 통해 기독교로 개종한다. 그리고 그는 다른 기독교 교부들과는 달리 회심의 순간에 자신이 경험한 고통과 희열을 중심으로 신학 체계를 전개한다. 그의 신학은 오로지 개인적인 종교 체험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인간에게도 세 가지 속성이 존재하며, 인간의 그 세 가지 속성은,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는 신의 세 가지 모습처럼 서로 분리되지 않고 본질적 통일성을 갖는다고 생각했다. 인간에게 몸과 마음과 영혼의 세 속성이 있음을 인정하면 쉽게 납득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삼위일체가 바로 신의 현존을 포함하고 있다고, 즉 인간의 삼위일체는 신의 삼위일체의 반사 형태라고 생각했다. 피조물인 인간은 인간 자체의 삼위일체 속성을 통해 신을 지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삼위일체와 신의 삼위일체 사이에는 헤아릴 수 없는 거리가 있다. 인간의 삼위일체는 마치 거울에 반사된 표상 같은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헤아릴 수 없는 거리를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건널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이 거울에 반사된 표상의 한계를 넘어 어떻게 신에게 직접 도달할 수 있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육신한 말씀(로고스)이 인간에게 다가오는 은총으로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회심을 통해 근본적인 변화를 겪으려면 그 은총을 향해 영혼의 문을 열어놓아야만 한다. 그렇게 영혼의 문을 열어놓아야 자아의 심연 속에 존재하는 신적 차원이 드러나 삼위일체 신앙의 원리가 활성화할 수 있으며,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이 근본적으로 변화해서 신의 삼위일체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정립한 은총 중심의 삼위일체 기독교 신앙 체계는 이후 서구 기독교 신앙의 중심 사상이 된다.
로마 교회의 분열
오늘날 가톨릭의 중심은 로마 교황청이며 정통교리는 삼위일체설이다. 그리고 기독교 탄생 후 사도 바울과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한 이래 로마, 혹은 로마 교황청이 줄곧 가톨릭의 중심 역할을 해 왔다. 그리고 16세기 유럽에서 종교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기독교의 정통성은 로마 가톨릭이 유지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본다면 맞다. 유럽 대륙에 새로운 유럽 문명 탄생을 가능하게 한 초석이 바로 가톨릭이며, 바로 그 가톨릭을 중심으로 탄생한 유럽 문명이 지구촌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독교가 탄생한 오리엔트 지역이 지금은 이스라엘을 비롯해 몇몇 작은 국가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 이슬람화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관점에서 본다면 기독교의 본산을 오로지 유럽으로 간주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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