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연재 22회 - 문학으로 보는 세계사: 로마의 분열과 서로마제국의 멸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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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진형준 (hjchin03@naver.com) 작성일 : 24.09.01 조회수 : 68 | |
5. 로마의 분열과 서로마제국의 멸망 로마제국의 분열과 게르만족의 로마제국 진출 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사망하자 로마제국은 후계자들에 의해 다시 조각난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두 명의 정제(正帝)와 두 명의 부제(副帝)를 두었던 시절과 비슷한 모습으로 로마제국의 통치권이 나누어진 것이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통치하던 시절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절대 권력을 장악하고 제국 전체를 통제할 전제군주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로마제국은 실질적으로 네 조각이 나버린 셈이었다. 그런 가운데 동방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경제적으로 번영을 구가했으며 군사적으로도 강화되었다. 반면에 옛 수도였던 로마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이후 몇십 년 동안 거의 내전으로까지 치닫던 로마제국을 테오도시우스 1세(346~395, 재위 379~395)가 잠시 재통일한다. 하지만 그는 사망하면서 로마제국을 둘로 분할, 동방의 통치를 장남인 아르카디우스(377~408)에게, 서방의 통치를 차남인 호노리우스(384~423)에게 맡긴다. 형식상으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시절의 동방 정제와 서방 정제 체제를 따른 것으로서 로마제국은 여전히 하나의 국가였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 재위 시절의 분할통치와 달리 이번의 분할은 영원한 분리가 되어 이후 두 제국은 완전히 다른 운명을 겪게 된다. 로마제국이 공식적으로 두 제국으로 분리된 것은 아니었지만, 역사가들은 이때 로마제국이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분열된 것으로 간주한다. 동방의 정제 아르카디우스를 비잔틴제국의 초대 황제로 간주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마치 동방의 기독교와 서방의 기독교가 완전히 분리되었듯 로마제국은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동로마제국은 비잔틴제국이라는 이름으로 1453년까지 1,000여 년간 더 지속한다. 하지만 서로마제국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내란, 점차 강성해진 유럽 대륙 민족들의 반란과 침입 등으로 인해 풍전등화의 처지가 된다. 설상가상으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하고 로마가 실질적으로 동서로 분열된 바로 그 시기에 유럽 대륙 내에서 게르만족이 민족 대이동을 시작한다. 게르만족의 민족 대이동은 비틀비틀하던 서로마제국에 마지막 결정타를 가한 셈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눈길을 로마제국으로부터 유럽 대륙으로 옮긴다. 시점의 이동을 통해, 그 사이 유럽 대륙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서로마제국의 멸망이 왜 새로운 유럽 문명의 탄생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는지, 그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분명히 짚어둘 것이 있다. 유럽 문명의 탄생은 동방에서의 헬레니즘 문명이나 비잔틴 문명의 탄생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헬레니즘 문명과 비잔틴 문명은 이미 자리 잡고 있던 선진 문명이 외부의 충격으로 인해 탈바꿈을 겪으면서 탄생한 문명이다. 물론 유럽 문명도 로마 문명이라는 거대 문명의 영향력으로 탄생한 문명이다. 하지만 로마 문명의 충격을 받기 이전의 유럽 대륙은 완벽한 주변부일 뿐이었다. 야만이라는 단어를 세련된 문명의 반대말로 사용한다면, 그곳은 야만 지대였다. 유럽 문명은 야만 상태에 있던 유럽 대륙이 로마 문명이라는 외부 선진 문명의 영향으로 완전히 새롭게 탄생한 문명인 것이다. 헬레니즘 문명이나 비잔틴 문명이 외부의 충격으로 쇄신을 이룩한 문명이라면 유럽 문명은 거의 신생 문명에 가깝다. 다시 말하거니와 동로마제국, 즉 비잔틴제국의 문명은 로마의 영향으로 쇄신의 길을 걷게 된 동방의 문명이다. 그 문명에서 쇄신의 주체는 이미 자리 잡고 있던 동방의 문명이며 로마는 그 문명에 충격을 가했을 뿐이다. 로마는 동방으로 중심이동을 하면서 동방 문명이 된 것이다. 비잔틴제국은 분명 로마제국의 연장이지만 그 문명은 오리엔트화 된 로마문명이다. 하지만 유럽 문명은 다르다. 유럽 문명을 이룩한 주체는 분명 유럽 민족이다. 하지만 엄밀히 볼 때 그 쇄신을 이룩한 주체는 유럽 문명이 아니라 오히려 유럽이 멸망시킨 서로마제국의 문명이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로마 문명의 충격으로 유럽이 혁신을 이룩한 결과 유럽 문명이 탄생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떤 의미로는 유럽 문명은 야만적인 힘과 역동성을 간직한 유럽 대륙 민족의 강력한 충격으로 로마 문명이 완전히 탈바꿈하고 새로 태어난 문명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중세 유럽에 제국이 출현할 때마다 로마제국의 적자(嫡子)임을 내세우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그 탈바꿈의 중심에 바로 기독교가 있었다. 유럽 문명을 로마 문명이 탈바꿈한 문명으로 볼 수 있지만, 유럽 문명은 분명히 로마 문명과는 다른 새로운 문명이다. 유럽 문명은 로마는 물론 당시까지 지구상에 존재했던 여타 문명들과는 완전히 다른 문명이다. 그렇기에 유럽 문명은 호모사피엔스의 기나긴 역사에 비추어 볼 때 가장 젊은 문명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젊은 문명이 지금 호모사피엔스가 지구상에서 이룩했던, 혹은 이룩한 다른 문명들을 압도하고 주도하고 있다. 그 문명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지금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유럽 문명이 얼마나 새롭고 젊은 문명인지 실감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눈길을 그리스·로마 중심으로부터 유럽 대륙 중심으로 옮겨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유럽 민족, 유럽 대륙, 유럽 문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 문명이 탄생할 시점에는 사실 유럽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유럽이라는 호칭은 존재했을지 몰라도 유럽 공동체라는 인식은 있을 리가 없었다. ‘유럽’이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페니키아의 왕 아게노르의 딸 에우로페에서 따온 것이지만, 신화 속의 ‘에우로페’는 그리스 문명의 크레타섬에 국한된 지역일 뿐이다. 사실상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유럽’이라는 개념 자체가 19세기에 유럽을 묶어줄 통합개념을 찾기 위한 노력에서 나온 발상이다. 게다가 ‘유럽’이라는 범주에 어느 지역까지 포함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지금까지도 관점에 따라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물론 우리가 지금 그런 논란에 끼어들 이유는 없다. 우리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으로 선진 문명의 세례를 받고 변신을 하게 된 지역 전체를 유럽이라 칭하고, 그곳에 살고 있던 민족을 ‘유럽 민족’이라고 칭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새롭게 탄생한 문명을 ‘유럽 문명’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다시 말하지만, 그 새로운 문명은 ‘유럽’이라는 명칭을 공통분모로 삼아 탄생한 문명이 아니다. 그 문명은 ‘기독교 공동체’로서 탄생한 것이다. 그 기독교가 바로 우리가 방금 살펴본 ‘케리그마’ 중심의 서방 로마의 기독교이다. 서로마제국의 종교였던 기독교는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새로운 문명 탄생의 주춧돌이 되고 축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살펴볼 유럽의 모습은 주로 카이사르의 갈리리 정복 이후부터이다. 그제야 유럽이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했고 유럽 문명 탄생의 첫걸음이 그때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유럽 문명 탄생의 첫걸음은 유럽인이 자발적으로 뗀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로마의 유럽 정복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유럽 대륙을 정복한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그 유럽 문명이 탄생했다. 이제부터 그 유럽 문명의 탄생 과정을 아주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유럽 대륙에서 제일 먼저 주도권을 차지한 종족은 켈트족이다. 켈트족의 본거지는 지금의 독일 남서부와 프랑스 북동부로서, 그들은 거의 유럽 전역을 휩쓸었고 기원전 5~6세기에는 그들의 독특한 문화를 유럽 전역에 전파했다. 그들은 기원전 4세기에 이미 로마와 델포이를 약탈했고 대서양에서 흑해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지배했다. 같은 언어를 말하고 같은 유형의 사회 조직, 같은 풍습과 생활양식을 가진 하나의 지배민족이 유럽 대륙에 일찌감치 군림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켈트족의 문화는 족장과 전사들의 문화일 뿐으로, 그들이 정복한 지역의 전통 토착 문화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했다. 켈트족이 유럽 전역을 지배한 것은 사실이지만, 유럽 대륙이 켈트족 문화로 통합된 하나의 문명권을 이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카이사르의 갈릴리 정복이란 바로 그 켈트족이 정복한 지역을 로마가 정복한 것을 말한다. 켈트족이 정복한 지역에 강력한 로마의 힘이 출현하자 켈트 문화는 순식간에 그 힘을 잃었다. 이탈리아 북부까지 진출해 있던 갈리아족 부족들의 정복을 시작으로 로마는 차츰 켈트족의 영역을 잠식했고, 로마에 의해 점령된 지역은 곧바로 로마화 되었다. 실제로 유럽 대륙 내 로마제국의 판도는 켈트족 영역과 놀랄 만큼 일치한다. 켈트족의 유럽 대륙 정복의 과실을 로마가 손쉽게 수확한 셈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로마는 유럽 대륙을 정복하면서, 국경을 도나우강과 라인강으로 정했다. 그렇기에 라인강 북쪽은 게르만족의 거주지였고, 지금의 체코와 슬로바키아에 해당하는 보헤미아-모라비아 지역과 지금의 루마니아에 해당하는 트란실바니아, 왈라키아 지역 등 도나우강 북쪽은 여전히 켈트족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1세기가 되자 도나우강 북쪽 지역 패권이 켈트족에서 게르만족으로 넘어간다. 게르만족이 그 지역에 침략해서 새로운 국가들을 세운 것이다. 켈트족보다 소박했으며 각 부족끼리의 동질성이 강한 게르만족이 유럽 무대에 주역으로 등장한 것이다. 바로 이 종족이 훗날 서로마제국을 접수하고 새로운 유럽 문명을 세우는 주역이 된다. 하지만 게르만족은 단일 민족이 아니었다. 로마인들이 제국 북쪽 국경 너머의 야만인들을 통칭해서 게르만족이라고 부른 것일 뿐이다. 나중에 로마제국 전 지역을 휩쓴 게르만족은 고트족, 반달족, 부르군트족, 알라마니족, 튜턴족 등 다양하며 브리타니아 섬에 정착한 앵글족, 색슨족도 게르만족 일군(一群)들이다. 로마제국과 게르만족의 만남은 로마제국과 켈트족의 만남과는 그 양상이 달랐다. 로마제국에게 켈트족 지배지역은 정복 대상이었다. 하지만 로마제국과 게르만족과의 전쟁은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침략을 물리치는 수비 전쟁이었고 게르만족의 입장에서 보자면 로마제국 내 침투의 성격을 지닌 전쟁이었다. 로마제국이 팍스 로마나를 구가하고 있던 1~2세기경, 도나우강 건너편에서는 민족 대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흑해 지역에 거주하던 고트족 등이 유럽 중앙부로 세력을 넓혔고 당연히 부족 간의 유혈 충돌이 벌어졌다. 당시 로마제국의 국경 근처에 살고 있던 게르만 부족들은 실질적으로는 로마와 동맹자 관계를 유지하면서, 로마제국과 야만 세계의 완충 역할을 하고 있었다. 북쪽에서 강력한 부족들이 침입해서 삶의 터전을 위협하자 그들은 로마제국에 구원의 손길을 요청한다. 하지만, 당시 황제였던 안토니우스 피우스는 이를 거절한다. 남들 싸움에 끼어들어 국력을 소모하기 싫다는 것이 표면적 이유였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도나우강 너머로 영토를 확장할 생각도 없었고 여력도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일 로마제국이 도나우강 너머를 탐내고 있었다면 얼씨구나 하며 그 싸움에 끼어들었을 것이다. 이전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 시, 그가 갈리아를 정복하면서 라인강과 도나우강 너머까지 진출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쉽게 말하면 영토 확장으로 얻는 이익보다 관리비용이 더 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카이사르는 라인강과 다뉴브강 너머를 탐하기보다는 그 두 강을 천연의 방어선으로 삼았다. 게르만 부족 간의 유혈 충돌에서 고트족 등 외지에서 밀려온 부족이 패권을 차지했고 그들에게 밀려난 부족들은 생존을 위해 새로운 영토가 필요했다. 그들의 시선이 어쩔 수 없이 도나우강 건너의 풍요로운 땅으로 향한 것은 당연했다. 동맹자에서 침략자로 처지가 바뀌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의 로마제국 침공은 정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도나우강 북쪽에 거주하던 게르만족은 로마제국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집권 시 대규모로 도나우강을 건너 로마제국 속주로 침입한다. 그리고 로마제국과 게르만족 사이에서 최초로 대규모 전쟁이 벌어진다. 166~172년과 177~180년,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마르코만니 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마르코만니족과 콰디족이 주축이 된 게르만족은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배한다. 그러나 그들은 적장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서 뜻밖의 선물을 받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도나우강 건너 새롭게 정복한 지역에 속주를 설치하려 했으나 그 뜻을 실현하지 못한다. 180년 3월 17일, 전염병에 걸려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빈에 설치한 병영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미 게르만족에게 선물을 준 터였다. 게르만족이 로마제국 내로 편입될 수 있는 중대 조치를 이미 실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전쟁으로 정복한 지역의 게르만족들과 전쟁 포로들을 노예로 팔거나 강제 노역에 동원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들을 전쟁으로 피폐해진 도나우강 근처의 속주들뿐 아니라 갈리아 속주로까지 이주시켜 로마 주민으로 정착시키는 사업을 시행했다. 그들은 쉽게 로마 시민으로 동화되었으며, 4세기까지 엄청난 수의 게르만족이 발칸반도와 갈리아 북부 지역에 농업 이민과 군사 이민으로 정착했다. 그러니 대다수 게르만족에게 로마는 적이라기보다는 출셋길이었다. 게다가 4세기에 이르자 로마군에 편입된 게르만족이 로마군의 중추를 이루게 되었으니, 서로마제국 멸망 전에 게르만족은 이미 로마제국 내부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 셈이다. 오현제 시대가 끝나고 3세기에 이르러 로마가 내전에 가까운 소용돌이에 처했다는 사실은 이미 우리가 확인한 바 있다. 로마 황제를 지목하는 실질적 권한이 원로원으로부터 로마 군단으로 넘어간 상태에서, 전투에서 웬만한 전공만 세우면 황제 지위 찬탈을 노리고 로마 황제를 참칭하는 자가 나타나는 등, 군인-황제 시대의 대혼란이 벌어진 바로 그 시기에 게르만족들이 로마제국의 농민과 군인으로 편입된 것이다. 제국 내 군단의 입김이 강해지고 군단 내 결속력이 강해지면서 로마제국 내 게르만족들의 위상도 덩달아 높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서로마제국 수도 함락 로마 군단 내 게르만인들의 위상이 그렇게 높아지는 한편, 거의 1세기 동안 게르만족 국가들은 로마제국과 비교적 사이좋게 지낸다. 게르만족 국가들은 로마제국과 ‘포이데라투스’라고 불리는 일종의 동맹자 관계를 맺고, 로마로부터 정기적으로 돈을 받는 대가로 부족민을 징집해서 제국 군대에 공급했다. 북아프리카에 진출한 반달족만 끝까지 로마와 화해하지 않고 적으로 남아 있었을 뿐, 나머지 게르만족은 대부분 로마제국과 화해하고 동맹국의 지위를 받아들였다. 말하자면 게르만족이 일종의 상설 수비군으로서 로마제국 영내에 머물게 된 셈이었다. 지난 세기에도 도나우강 유역의 게르만족은 로마제국과 비슷한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지역도 국한되어 있었고 그 규모도 작았다. 하지만 4세기에 이르러 게르만족은 이미 대규모로 로마제국 전역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로마와 게르만족이 각자 자신의 법률과 제도와 종교를 유지하면서 나란히, 혹은 뒤섞여 지내게 된 것이다. 그러는 사이 게르만족 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만 하는 아주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로마제국과 동맹 관계를 유지하면서 로마 문명의 영향을 받은 게르만족이 기독교 세례를 받은 것이다. 종교를 통해 두 이질 민족, 이질 문명이 맺어질 가교가 마련된 셈이었다. 그러나 대다수 게르만족이 받아들인 기독교 교리는 로마제국이 공식적으로 채택한 기독교 교리와는 달랐다. 대다수 게르만족, 그중에서도 가장 큰 세력을 떨치고 있던 고트족의 기독교도들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추방된 아리우스파의 교리를 신봉했다. 잠시 뒤에 살펴보겠지만, 훗날 프랑크족을 중심으로 한 게르만족은 아리우스의 교리를 버리고 로마제국의 공식 기독교 교리,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로마 중심 서방교회의 교리(가톨릭)를 받아들이면서 정확하게 서로마제국의 후계자가 된다. 그런데 4세기 말에 접어들자 상황이 급변한다. 로마제국과 비교적 사이좋게 지내던 게르만족들이 서로마제국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제국을 공격한 것이다.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본격화되어 유럽 대륙 전체에 경천동지의 역사적 격랑을 몰고 온 것이다. 당시 로마제국은 이미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분열된 상태였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동로마제국은 혼란스러운 국제 상황 속에서도 번영의 길을 걷고 있었고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로마제국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지경에 처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 게르만족이 본격적으로 민족 대이동을 감행하면서 이미 약자의 처지로 전락한 서로마제국을 주된 공략 대상으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르만족들이 이동하면서 로마제국을 침공한 것은 앞서 도나우강 근처에 거주하던 게르만족들이 로마제국을 공격하던 것과 표면적 양상은 비슷하다. 외지에서 침략해온 새로운 부족들에 쫓겨 살길을 찾아 로마제국을 침공한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외지에서 침략해온 부족이 또 다른 게르만족이 아니라 유라시아 대륙 초원지대 출신인 훈족(흉노족의 일파)이라는 것이 전과 달랐다. 서흉노 일파임이 분명한 훈족이 어떻게 4세기 말이 되어 갑자기 유럽 대륙에 등장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기원전 1세기, 중국 한나라와의 실크로드 쟁탈전에서 패배한 서흉노는 서쪽으로 쫓겨 지금의 투르키스탄 지역과 카자흐스탄 지역까지 도망간다. 하지만 그곳까지 추격한 중국 한(漢)나라 원정대에 의해 우두머리인 질지가 살해당한다. 이후 서흉노의 자취는 사라지고 남은 기록도 없다. 거대 문명과 접촉하지 않고 지내면서 작은 정보마저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질지가 그곳으로 데려갔던 부족의 후예들이 그곳에 상당 기간 머물렀을 것이며, 4세기 말이 되자(약 370~375)볼가강과 도나우강을 건너 유럽을 공격하면서 비로소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어쨌든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게르만족의 이동이라는 큰 사건이 저 멀리 중국과 유라시아 대륙에서 벌어진 일과 긴밀히 연관이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훈족은 370년경 우크라이나 스텝에 거주하던 사르마트 계 유목민족인 알란족을 격퇴한 후에 우크라이나 서부에 거주하던 서고트족을 공격했다. 훈족에게 쫓긴 서고트족은 발칸반도 전역을 약탈하고 이탈리아반도까지 침입했다. 그뿐 아니라 라인강 쪽에서도 사르마트 계열의 알란족을 비롯해 반달족, 수에비족 등이 로마제국 영토에 침입했다. 이들 역시 훈족에게 쫓겨 이동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게르만족들은 갈리아 전역을 약탈한 후 피레네산맥을 넘어 에스파냐로 이동했으며 그중 반달족은 서로마제국의 주요 세입원이었던 북아프리카를 침략했다. 또한, 프랑크족과 부르군트족, 알라마니족은 라인강 서안을 점령했으며, 훈족은 동방과 서방의 로마제국 속주들을 마음껏 유린했다. 이번 게르만족의 로마 침공은 이전의 침공과는 그 양상과 결과가 완전히 달랐다. 도나우강 주변 로마제국 속지 부근에서 일어났던 게르만족과 로마제국의 충돌은 국지적인 충돌이었다. 그러나 5세기에 접어들자마자 두 민족은 로마제국 전역에서 전면적으로 충돌한다. 게다가 서로마제국이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상태에서 벌어진 충돌이라는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전의 충돌에서는 로마제국이 게르만족을 수용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하지만 이번 충돌에서는 게르만족이 서로마제국을 접수하는 결과를 낳았다.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로마제국 침공에서 가장 앞장을 섰으며 서로마제국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종족이 바로 서고트족이다. 알라리크를 지도자로 한 서고트족은 410년 로마를 포위하고 대약탈을 감행한다. 로마는 이미 서로마제국의 수도가 아니었지만,로마가 로마제국의 발원지이자 기독교 사도 전승 본산이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던 로마 시민들은 깊은 충격을 받았다. 알라리크의 로마 약탈은 서로마제국 멸망의 전주곡이면서 동시에 결정타였다. 로마를 약탈한 서고트족은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와 협상하여 아키텐지방(지금의 프랑스 남서 부)의 땅을 얻고 415년, 서고트왕국을 건설했으며 나중에는 이베리아반도의 에스파냐를 본거지로 삼는다. 444년과 452년, 기진맥진하던 서로마제국에 훈족의 아틸라가 침입했다. 사실 이 당시만 해도 서로마제국은 허울뿐인 제국이었다. 잉글랜드와 북아프리카는 이미 게르만족에게 빼앗긴 상태였고 이베리아반도와 갈리아 곳곳을 게르만족들이 점령한 상태였다. 말하자면 서로마제국 영토는 누더기로 변해버렸고 남은 것은 이탈리아반도뿐이었다. 로마를 침공한 아틸라가 전염병, 본거지의 반란 등의 악재 때문에 물러갔지만, 서로마제국은 풍전등화 신세였다. 게다가 서로마제국 황제도 정식 황제라고 볼 수 없었다. 황제의 자리를 놓고 여러 차례 반란과 암살사건이 벌어졌으며, 이후 서로마에 수많은 황제가 출현했으나 모두 동로마에서 인정하기를 거부한 황제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455년에는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반달족이 지중해를 건너와 로마를 공격했고 막대한 양의 보물을 약탈해갔다. 그리고 476년 게르만족 출신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허약하기 짝이 없던 서로마제국 군대를 격파하고 수도 라벤나로 진입, 허울뿐이었던 서로마제국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폐위시켜버린다. 오도아케르는 게르만족이지만 그가 로마 군단 용병 출신인 점을 감안하면 일종의 내부 반란이라고도 볼 수 있다. 어쨌든 그 순간 서로마제국은 멸망한 셈이다. 제국의 마지막 황제 이름이 로마의 시조인 로물루스와 로마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결합으로 되어있다는 것이 역설적이다.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오도아케르는 스스로 황제라 칭하지는 않았지만, 동로마제국의 황제인 제논에게 사절을 보내 이탈리아를 통치할 권한을 달라고 요구했다. 동로마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한 것이니 말하자면, 서로마제국 황제를 폐위한 자신의 행동이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킨 행위가 아니라는 것, 자신에게 서로마제국을 이어갈 의도가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동로마제국 황제 제논은 오도아케르에게 총독 칭호를 내리고 그의 서로마제국 지배를 일단 묵인했다. 오도아케르의 의도야 어떻든 역사가들은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것으로 간주한다. 480년에 동로마 황제 제논은 서로마제국의 완전 패망을 선언하고 자신을 로마제국의 유일한 공식 황제로 선포한다. 공식적으로 서로마제국의 멸망이 확인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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