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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연재 23회 문학으로 보는 세계사 - 유럽 문명의 탄생 : 유럽의 탄생과 기독교
작성자 : 진형준 (hjchin03@naver.com)  작성일 : 24.10.01   조회수 : 37

6. 유럽 문명의 탄생

 

유럽의 탄생과 기독교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역설적으로 그 위상이 높아진 인물이 있었다. 바로 로마 총대주교이자 교황인 레오 1세였다. 452년 훈족이 로마를 침공했을 때 허울뿐인 로마 황제는 속수무책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세에게 구원을 청한다. 레오 1세는 로마 시외로 나가 훈족의 지도자 아틸라와 담판을 벌인다. 아틸라가 물러간 것은 그 담판 덕이라기보다는 전염병과 본거지에서의 반란 때문이었지만 레오 1세는 로마 시민들의 뇌리에 시민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깊이 심어 놓는다.

455년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반달족이 로마를 침공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서로마제국 황제는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서로마제국 황제 발렌티아누스 3세를 암살하고 황제 자리를 찬탈한 인물이었으니, 동로마제국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그를 서로마제국의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로마에 머물던 페트로니우스는 반달족이 쳐들어오자 로마 시민 틈에 섞여 도망가다가 성난 군중에게 발각되어 살해당한다.

반면에 레오 1세는 이번에도 가이세리크와 11 담판을 벌인다. 그는 반달족의 로마 입성을 허락하기는 했지만, 최소한 무분별한 약탈과 살육으로부터 로마 시민을 구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로부터 로마 시민들은 교황을 그들의 유일한 보호자로 바라보게 되었고, 대외적으로도 교황은 사실상 로마시의 수호자가 된다. 교황의 지위가 안팎으로 한껏 높아진 것이다. 레오 1세는 훗날 대교황의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역사가에 따라서는 레오 1세를 실질적인 초대 교황으로 간주하는 사람도 있다. 오늘날 가톨릭 내부에서는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받든다. 하지만 사실 당시에는 교황이라는 공식 직위 자체가 없었다. 세속을 관장하는 동방의 황제와 맞서기 위해 로마 교회가 4세기에 교황이라는 직함을 만들었고 동방의 로마에서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레오 1세를 실질적인 초대 교황으로 간주하는 것도 그다지 무리는 아니다. 어쨌든 동로마제국에서는 황제의 현실적 위상이 교회보다 우위에 있었던 반면에 서방에서는 교황의 현실적 영향력이 한껏 높아져 있었다.

 

역사상 서로마제국은 476년에 멸망했다. 하지만 로마의 정치 체제와 문화는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종말을 고하지 않았다. 로마 문명은 유럽 민족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면서 새로운 유럽 문명으로 재탄생했다. 달리 말한다면 서로마제국 문명 자체가 지중해권과 남유럽으로부터 중부 유럽과 서유럽으로 중심이동하면서 새로운 문명으로 재탄생한 셈이라고 보아도 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 기독교가 있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역으로 교황의 세속적 권한과 현실적 위상이 강화되었다는 것은 기독교가 새로운 문명 탄생에서 실질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는 로마의 문명을 새로운 유럽 문명과 이어주는 촉매였으며 유럽 문명 통합의 핵심이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했을 때 피정복민의 대표는 서로마제국의 관료나 법률가 등이 아니라 각 지역의 주교였다. 서로마제국 정부가 무너진 뒤 가톨릭 주교가 민중의 대표가 된 것이다. 가톨릭 주교는 오로지 종교적이고 영적인 지도자로서만 민중을 대표했던 것이 아니었다. 주교는 도시 수비대를 조직했고, 게르만족 지도자들과 교섭했다. 훈족과 반달족이 로마를 침공했을 때 교황 레오 1세가 용감하게 담판에 나선 것은 더없이 좋은 본보기이다.

게다가 가톨릭 주교는 종교적 신앙만 굳건히 지킨 것이 아니다. 로마제국의 주교는 로마 문명이 우월하다는 신념도 버리지 않았다. 로마제국, 더 정확히는 동로마제국에 대한 반체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던 로만가톨릭 주교들이 로마 문명이 우월하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모순처럼 보인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로마를 침공한 게르만족이나 훈족은 야만족이었다. 로마의 기독교도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내세우며 로마제국 황제의 권력에 맞섰지만, 그들이 보기에 로마인은 게르만족이나 훈족과 달리 문명인이었다. 로마의 기독교도들은 교회가 살아남는 한 로마제국의 문명도 이어질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들에게 야만족의 침입은 하느님이 부여한 시련이자 시험이었다. 로마가 힘으로 야만족들에게 정복당했다 하더라도 야만족들을 기독교도로 만듦으로써 그들을 로마인, 즉 문명인으로 만들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그리고 바로 그 길이 시험과 시련을 이기는 길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희망대로 로마를 정복한 게르만족은 로마 문명을 받아들였으며 기독교를 수용했다. 그 결과 라틴 문명은 로마-게르만 문명, 즉 유럽 문명으로 탈바꿈했다.

 

게르만족이 기독교를 일찌감치 받아들이긴 했지만, 로마인과 게르만족이 처음부터 종교적으로 통합된 것은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 부르군트족, 서고트족, 동고트족, 반달족들이 세운 왕국은 모두 아리우스파 교리를 믿었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게르만족 왕국의 기독교도들은 초기에는 서로마제국의 가톨릭교회와 대립했다.

서로마제국 멸망 직후 게르만 종족 간의 치열한 패권 다툼에서 승리하고 유럽 대륙과 이탈리아반도를 장악한 종족은 프랑크족이었다. 그 업적을 달성한 인물이 프랑크족 지도자 클로비스( Clovis, 466~ 511) 1세였다. 그는 강력한 맞수였던 서고트족을 에스파냐로 내쫓고 알라마니족, 부르군트 왕국 등을 공격하여 갈리아 일대를 손에 넣는다. 로만-게르만 혼합왕국의 통치자가 된 것이다. 광활한 지역을 통치하게 된 그는 로마제국의 뒤를 이어받았다는 정통성 확보를 위해 508년 부하 3,000명과 함께 아리우스파로부터 로만가톨릭으로 개종한다.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교황으로부터 로마 교회 수호자라는 칭호를 부여받았으며, 일부 로마 교회 소속 주교들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내리기도 한다. 로마 교회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음으로써 그는 대내외적으로 메로빙거 왕조(481~751)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으니, 훗날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기원이 이때 열린 셈이었다.

클로비스 1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로마 문명과 유럽 문명은 가톨릭을 매개로 확실한 연결 고리가 마련된 셈이었다. 하지만 메로빙거 왕조 시절만 해도 로만가톨릭은 아직 소수파였고 대다수 게르만족은 여전히 아리우스 교리를 신봉하고 있었다. 유럽의 게르만 왕조가 로마 교황과 손을 잡고 정식으로 서로마의 적통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한 위대한 인물을 기다려야 했으니 그가 바로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 Carolus, 카롤루스 1, 742~814, 프랑크 왕 재위 768~814, 신성로마제국 재위 800~814)이다.

7세기 말부터 프랑크 왕국을 지배하던 메로빙거 왕조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군주들이 유약하고 힘이 없었기에 프랑크 왕국의 실권은 궁재(宮宰)에게 넘어가 있었다. 궁재란 프랑크 왕국의 각 지역을 장악한 귀족 가문의 대표를 말한다. 궁재의 득세는 왕권이 쇠약해진 것을 뜻한다. 688년에 피핀 2세가 프랑크 왕국 전체의 궁재(宮宰)가 되어 실권을 장악했고, 그 아들 카를 마르텔(Charles Martel, Karl Martell)732년에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교도의 침입을 격퇴함으로써 프랑크 왕국의 실질적 지배자가 된다. 카를 마르텔의 아들 피핀 3세는 751년에 메로빙거 왕조 최후의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당시 교황 스테파누스 3세가 피핀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함으로써 프랑크 왕국에 새로운 카롤링거(카롤루스)왕조가 시작되었다.

때마침 프랑크 왕국과 교황의 유대를 공고히 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탈리아 북부를 호령하던 롬바르드족이 라벤나의 교황청을 침범한 것이다. 롬바르드족은 아리우스 교리를 신봉하고 있었다. 교황은 피핀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피핀은 롬바르드족을 제압한다. 그뿐이 아니었다. 피핀 3세는 롬바르디아 왕국 일부였던 라벤나 일대의 영지를 교황에게 바쳤으니, 그로부터 가톨릭 교황의 직할령인 교황령이 시작되었다. 교황이 현실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피핀이 교황의 기독교 선교 정책을 적극 지지하고 후원함으로써 교황과의 유대를 한결 공고히 했음은 물론이다.

피핀 3세의 아들인 샤를마뉴는 왕위에 오르자 오늘날의 프랑스, 독일, 에스파냐, 이탈리아에 해당하는 넓은 지역을 정복했으며 이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까지 손에 넣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유럽 대륙 북부의 엘베강까지 왕국의 영역을 넓혔다. 엘베강은 독일과 체코의 국경을 이루는 리젠 산맥의 남쪽 비탈면에서 발원하여 북해로 흘러드는 강이니, 라인강 너머까지 진출하지 못한 로마제국의 꿈을 게르만족의 한 사나이가 이룬 것이다. 샤를마뉴 대제에 의해 갈리아는 다시 통일되었고, 북동쪽으로는 옛날 로마제국의 국경보다 훨씬 멀리까지 세력이 넓어졌다. 그의 정복 사업에 의해 알라마니족과 튀링겐족, 바이에른인이 연달아 정복되어 프랑스뿐 아니라 중세 독일의 모태이기도 한 거대한 왕국이 태어났다.

샤를마뉴는 정복지에 로만가톨릭 신앙을 전파한다. 그의 꿈이 서로마제국의 부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교황 레오 3세는 크나큰 선물을 준비한다. 800년 크리스마스 날, 샤를마뉴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당당하게 등장한다. 임석한 귀족, 기사, 승려, 시민이 환호하는 가운데 로마 교황 레오 3세는 프랑크 왕국의 왕 샤를마뉴의 머리에 제관을 씌워주고 로마인의 황제라는 직함을 수여한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지 325년 만에 서로마 황제가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여전히 동로마 황제의 영향권에 놓여 있던 교황 레오 3세는 내심 동로마 황제와의 관계를 끊고 자율성을 획득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프랑크 왕국의 비호를 받기 위해 프랑크족의 왕에게 서로마 황제의 제관을 씌워주었던 것이며 그 순간, 샤를마뉴는 프랑크 왕국의 왕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다시 태어난다.또한, 그 순간은 로마제국의 문명이 가톨릭을 중심으로 한 유럽 문명으로 재탄생하는 연금술의 순간이기도 했다. 고대 로마와 고대 게르만이 결합해서 새로운 문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으니, 고대 로마 문명과도 구별되고, 오리엔트의 비잔티움 문명과도 구별되는 새로운 문명이 탄생한 것이다.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국의 왕 샤를마뉴의 머리에 직접 제관을 씌워주는 순간은 지방 부족국가의 군주가 세계제국의 군주권을 획득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 제관을 교황이 직접 씌워주었다는 사실, 바로 그 사실이 훨씬 더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 상징적 행위로 인해 유럽의 왕권’, 혹은 황제권은 고대의 왕권이나 로마제국의 황제권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게르만 국가 왕권의 정통성이 한 인물의 세속적 권력 장악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로마 교회와의 제휴 관계를 기반으로 결정되는 가톨릭 왕권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에서 고대 로마 문명과는 구별되는 유럽 문명만의 독특한 새로운 질서가 형성된다.

주지하다시피 고대의 유럽 대륙은 온갖 부족·종족 간의 세력다툼의 무대였으며 서로마제국을 무너뜨린 뒤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통합해줄 중심도 없었고, 보편적 가치도 없었다. 한 종족이 유럽 대륙을 장악하더라도 자신이 대륙의 패자라고 내세울 명분도 없었고, 그들을 유럽의 패자라고 인정해줄 구심점도 없었다. 그 명분과 구심점 역할을 바로 가톨릭이 맡게 된 것, 그것이 바로 기독교 왕권의 의미이다.

로마 교황이자 라틴인인 레오 3세가 게르만인인 샤를마뉴의 머리에 제관을 씌워줌으로써, 게르만인도 라틴인도 기독교라는 공통의 신앙을 갖는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선포된 셈이었다. 그 역사적 사건을 출발점으로 유럽인은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사회에 살고 있으며 공동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새로운 질서 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한 기독교적 공동사회의 이념과 질서 의식을 갖게 됨으로써 유럽은 비로소 통합을 이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다. ‘기독교 왕권이라는 개념을 통해 유럽 문명은 민족·지역의 특수성을 넘어서는 보편성을 지향하게 된다. 기독교 자체가 보편성·세계성을 특징으로 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후의 세계 역사에서의 유럽인의 온갖 활동은, 기독교가 지닌 보편성·세계성 지향의 성격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그 핵심을 이해할 수 없다. 기독교는, 더 정확히 로만가톨릭은 유럽 통합과 새로운 유럽 문명 탄생의 구심점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유럽 문명 자체가 보편성·세계성을 지향하게 해주었다.

기독교가 유럽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는 것은, 유럽인들이 받아들인 이념과 질서가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질서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정신적·종교적 질서로도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단순하게 말한다면 세속적 질서는 군주가 담당했고 정신적 가치와 질서는 기독교가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왕권과 교권이 각기 양 날개로서 작동하게 된 곳, 그곳이 바로 새로운 유럽 문명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양 날개가 항상 이상적으로 작동할 수는 없다. 각 민족·왕가 간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으며, 교권과 왕권 간의 권력 다툼도 끊이지 않았으니 그 둘이 사이좋게 세속 권력과 종교적 권력을 나누어 가지고 평화롭게 지낸 적은 드물었다. 중세 유럽의 역사는 바로 이 이원적 가치와 질서 간의 대립과 갈등과 봉합의 역사이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도 왕권 조직과 교권 조직이 공유하고 있는 사회 체제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봉건제였다. 중세 유럽은 기독교라는 구심점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봉건제라는 특징을 기반으로 삼고 있는 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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